메리츠금융지주는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파는 회사가 아니다. 손해보험을 파는 메리츠화재, 주식·채권을 중개하고 굴리는 메리츠증권, 돈을 빌려주는 메리츠캐피탈 — 이 세 회사를 한 지붕 아래 묶어 거느리는 다. 지주회사란 직접 장사를 하기보다 자회사 지분을 쥐고, 그 자회사들이 벌어 올려 보내는 으로 살림을 꾸리는 구조를 말한다. 실제로 이 회사의 별도(지주 홀로) 살림을 보면 자회사에서 받은 배당수익이 1조3383억으로, 이 돈이 지주 살림의 뼈대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은 지붕 위에 앉은 사람이 한 명이라는 것이다. 조정호 회장이 본인 지분 55.78%, 특수관계자를 포함하면 58.78%를 쥐고 있다. 상장회사에서 한 사람이 절반을 훌쩍 넘게 쥐는 경우는 드물다. 국민연금이 6.79%로 그다음일 만큼, 나머지 지분은 잘게 흩어져 있다. 자산 135.5조, 자본 11.3조짜리 금융그룹의 방향키가 사실상 한 사람 손에 있다는 뜻이다.
세 자회사 중에서도 이 그룹의 이익 색깔을 정하는 건 손해보험을 파는 메리츠화재다. 손해보험은 자동차보험이나 실손처럼 대개 1년짜리 짧은 계약을 굴린다. 계약이 짧으니 자본이 가볍고, 가벼운 자본 위에서 이익을 내면 자본 대비 수익률(ROE)이 높게 찍힌다. FY2025 이 그룹의 ROE는 20.9%. 자본 11.3조 위에서 순익 2조3501억을 냈다는 뜻이고, 뒤에서 보겠지만 이 숫자가 비교된 보험사 여섯 곳 중 가장 높다. 여기까지가 이 회사의 평소 얼굴이다.
2026년 3월 26일, 정기주주총회가 열린 그날 회사는 두 장의 공시를 나란히 냈다. 하나는 7000억원 규모로 자기 회사 주식을 다시 사들이는 계약을 새로 맺었다는 것 — 그것도 '이렇게 사들인 주식은 나중에 소각한다'고 못 박았다. 소각이란 되산 주식을 장부에서 아예 없애버리는 것을 말한다. 배당처럼 현금을 나눠주는 대신, 유통되는 주식 자체를 줄여 남은 주주 몫을 키우는 방식이다. 취득 예정 주식은 628만3662주.
같은 날 두 번째 공시는, 바로 직전인 2월 9일부터 굴리던 2000억원짜리 되사기 계약을 이미 다 채웠다며 접고, 실물로 돌아온 165만4천 주를 전량 태우겠다는 것이었다. 사고, 태우고, 다시 사기로 하고 — 짧은 주기로 같은 동작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 며칠 전인 2월 9일 나온 실적을 보면, FY2025 은 2조3501억이었다. 한 해 번 돈에 육박하는 규모를 되사서 없애겠다는 그림이 지금 이 회사 위에 올라와 있다.
FY2025 손익계산서를 처음 펴면 두 숫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 은 2조8727억으로 전년보다 9.9% 줄었는데, 맨 아래 은 2조3501억으로 오히려 0.7% 늘었다. 법인세도 8114억으로 전기 8077억과 거의 같으니, 순익을 붙든 게 세금 덕도 아니다. 보험사에서 이 어긋남은 착시에 가깝다. 보험의 이익은 그해 상품을 얼마나 팔았느냐가 아니라, 과거에 팔아둔 계약이 쌓아놓은 미래이익을 이번에 얼마나 장부로 흘려보냈는지, 그리고 금리가 움직이며 운용자산과 보험부채의 평가가 어떻게 출렁였는지의 합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업이익이 줄었다고 본업이 무너졌다 단정할 수 없고, 순익이 버텼다고 잘 팔았다 읽을 수도 없다. 이 자료가 말해주는 건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이 회사의 진짜 문장은 손익계산서 바깥, 자본에서 쓰였다. 전기 자본변동표엔 매입 8624억, 소각 6401억, 배당 4483억이 나란히 찍혀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모순이 하나 있다. 순이익을 냈는데도 지주 홀로의 별도 이익잉여금은 3조3546억에서 2조7857억으로 5688억이 줄었다. 이익을 냈으면 쌓인 곳간이 늘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범인은 손익이 아니라 자본거래에 있다 — 6401억어치 자기주식을 태우면서 그만큼을 이익잉여금에서 덜어냈기 때문이다. 벌어들인 것과 되돌린 것이 장부의 다른 칸에서 만나 상쇄된 자리다.
여기서 회사가 '몰린 것'과 '택한 것'을 갈라볼 수 있다. 영업이익이 9.9% 줄어든 표면 — 이건 금리와 보험 회계가 그해 그렇게 써낸 숫자에 가깝고, 회사가 마음대로 만든 재량의 결과라 단정할 자료는 없다. 반면 번 돈을 어디에 쓸지는 온전히 선택의 영역이다. 순익에 맞먹는 돈을 배당으로 흩뿌리는 대신 주식을 되사 태우는 쪽을, 그것도 짧은 주기로 반복하는 쪽을 이 회사는 골랐다. 회사는 이 신탁을 '주주가치 제고'와 '주주환원정책 이행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그 설명과 나란히 놓이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주식을 태워 발행 주식 수가 줄면, 손 하나 대지 않아도 남은 주주의 지분율이 저절로 올라간다. 조정호 회장의 특수관계 포함 지분율은 56.14%에서 58.21%로, 다시 6월엔 58.78%로 올라섰다. 여기엔 특수관계자 김종민이 장내에서 주식을 사들인 몫도 겹쳐 있다. 소각이 주주환원이면서 동시에 지배력을 배당보다 조용히 키우는 통로이기도 하다는 것 — 두 사실을 어떻게 이어 붙일지는 이 자료만으론 가를 수 없고, 읽는 사람 몫으로 남는다.
보험이라는 산업은 회계 체계 자체가 다른 세계다. 2023년부터 보험사는 계약을 파는 순간 그 계약이 앞으로 낼 이익을 미리 계산해 부채로 쌓아두고(회계에선 이걸 CSM, 보험계약마진이라 부른다), 그 이익을 계약 기간에 걸쳐 조금씩 장부로 흘려보내며 그해 이익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지금 찍힌 순이익은 '올해 얼마나 팔았나'가 아니라 '과거에 팔아둔 계약을 이번에 얼마나 흘려보냈나'에 가깝다. 진짜 미래는 재무제표 본표가 아니라 주석에 적힌 CSM 잔액이라는 미래이익의 저수지에 담겨 있다.
그 위에서 결과를 더 크게 가르는 건 '생명보험이냐 손해보험이냐'다. FY2025 ROE를 여섯 회사에 나란히 세워보면 구조 차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삼성생명 3.8%, 한화생명 5.0% — 두 생보사가 아래쪽에 있다. 삼성생명은 순이익 2조4515억을 내고도 ROE가 3.8%인데, 이건 부실이 아니라 자본이 64.8조로 여섯 곳 중 압도적으로 무겁기 때문이다. 계열사 지분과 오래 쌓인 장기계약이 분모를 키운다. 반대편엔 손해보험사들이 있다. 삼성화재 9.5%, DB손해보험 16.4%, 현대해상 19.8%, 그리고 메리츠금융지주 20.9%. 단기계약의 빠른 회전과 가벼운 자본이 높은 ROE를 만든다. 메리츠의 20.9%는 이 여섯 중 가장 높은 숫자이자, 손보 구조가 극단까지 간 얼굴이다. 생보의 낮은 ROE와 손보의 높은 ROE는 우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種)의 표정이다.
같은 손보라도 통과 방식은 다르다. 삼성화재는 자본 21.3조로 손보 중 가장 두툼한 완충을 두고 ROE 9.5%를 냈고, DB손해보험은 합산비율이 약 105%로 보험영업 자체는 적자 부근이지만(받은 보험료보다 나간 보험금·비용이 더 많다는 뜻이다) 운용에서 나온 투자이익으로 메워 ROE 16.4%를 만든다. 현대해상은 자본이 5.2조로 가장 가벼워 ROE 19.8%가 나온다. 메리츠는 이 가벼운 손보 구조 위에서 번 돈을 자사주 소각으로 되돌리는 자본정책을 얹은 자리에 서 있다. 다만 그 되사기의 속도엔 눈에 안 보이는 상한이 있다. 보험사는 지급여력비율(K-ICS)이라는 규제 자본선을 지켜야 하는데, 메리츠화재의 이 비율은 241.3%에서 반기엔 230.5%(잠정)로 낮아졌다. 금리가 내리면 보험부채의 현재가치가 부풀어 이 비율이 눌리고, 그러면 배당과 자사주에 쓸 여력도 함께 좁아진다. 되사기라는 이 회사만의 색깔이, 규제선이라는 공통의 벽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FY2025의 메리츠금융지주는 순이익이 2조3501억에서 사실상 멈춘 해였고, 동시에 그에 맞먹는 돈을 되사서 태운 해였다. 새로 맺은 7000억 신탁이 언제 얼마나 소각으로 이어질지는 신탁이 끝나는 시점의 별도 이사회에서 정한다고 회사는 예고했을 뿐, 아직 실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사이 캐피탈은 사업보고서에서 순익 4021억(+37%)을 냈다가 반기엔 부실여신 회수 지연과 충당금으로 420억(-77%)까지 내려앉았고, 화재의 지급여력비율도 241.3%에서 반기엔 230.5%(잠정)로 내려오는 중이다. 금리가 이 규제선을 어느 쪽으로 밀지, 번 만큼 되사 태우는 리듬이 그 벽 앞에서 유지될지 — 이 회사의 다음 이야기는 손익계산서보다 자본계정과 규제선 위에서 먼저 쓰일 자리에 놓여 있다.
FY2025, 여섯 보험사의 성적표를 나란히 펴 보면 겉모습은 비슷하다. 삼성생명 2조4,515억, 메리츠금융지주 2조3,501억, 삼성화재 2조203억, DB손해보험 1조7,906억, 현대해상 1조198억, 한화생명 8,363억. 여섯 곳 모두 흑자고, 대부분 조 단위 언저리다. 방향으로만 보면 다 같이 좋은 해를 보낸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정작 '올해 보험을 누가 잘 팔았나'는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보험이라는 산업이 다른 업종과 회계의 문법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2023년부터 보험사는 계약을 파는 순간 그 계약이 앞으로 낼 이익을 미리 계산해 장부에 부채처럼 쌓아둔다. 회계에서는 이걸 CSM이라 부르는데, 말하자면 '아직 손익으로 인식하지 않은 미래이익의 적립분'이다. 그 적립분을 계약 기간에 걸쳐 조금씩 헐어 당기 손익으로 옮긴다. 그러니 올해 장부에 찍힌 순이익은 올해 판매량이 아니라, 과거에 판 계약이 쌓아둔 적립분을 이번에 얼마나 헐었고, 금리가 움직이며 운용자산과 보험부채의 평가를 어느 쪽으로 밀었는지의 합이다. 메리츠의 손익계산서가 이 낯섦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업이익은 2조8,727억으로 9.9% 줄었는데, 맨 아래 순이익은 2조3,501억으로 오히려 0.7% 늘었다. 위와 아래가 반대로 걸어갔다. 여섯 곳이 같은 회계의 방 안에 있지만, 그 방을 채운 공기를 모두 같은 이유로 마신 건 아니다 — 메리츠만 해도 이 숫자는 순수 보험이 아니라 손해보험(메리츠화재)과 증권 손익이 합쳐진 연결값이다.
한 겹 더 내려가면 겉모습의 비슷함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삼성생명은 순이익 2조4,515억, 메리츠는 2조3,501억 — 벌어들인 이익의 크기는 거의 붙어 있다. 그런데 자본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굴렸는지를 보는 지표(ROE, 순이익을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를 대보면 삼성생명은 3.8%, 메리츠는 20.9%다. 거의 같은 이익을 냈는데 효율은 다섯 배 넘게 벌어진다. 여섯 곳 전체로 넓혀도 3.8%에서 20.9%까지, 같은 산업이라기엔 믿기 어려운 폭이다.
이 벌어짐의 정체는 분자가 아니라 분모에 있다. 삼성생명의 자기자본은 64.8조로 6사 중 압도적으로 크고, 메리츠는 11.3조다. 같은 이익을 훨씬 무거운 자본으로 냈으니 효율은 낮게 찍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어떤 회사는 이토록 무거운 자본을 지고 있고, 어떤 회사는 가볍게 굴리나. 이 질문의 답은 회사의 실력이 아니라 회사가 오래전 고른 자리, 그리고 번 돈을 어떻게 다루기로 한 선택에 있다. 이 산업의 결과를 가르는 두 개의 축이 거기서 나온다.
첫 번째 축은 '무엇으로 이익을 버느냐'다. 생명보험은 수십 년짜리 장기 보장성·저축성 계약을 판다. 그래서 미래이익 적립분도, 그 돈을 굴리는 운용자산도 수백조 규모로 거대하게 쌓인다. 삼성생명이 자본 64.8조를 지고 있는 건 여기에 삼성전자를 비롯한 계열사 지분까지 얹혀 있기 때문이고, 한화생명도 16.6조의 자본 위에 저축성 부채와 큰 운용자산을 안고 금리에 흔들린다. 삼성생명 3.8%, 한화생명 5.0%라는 낮은 ROE는 부실의 신호가 아니라, 무거운 자본을 짊어진 생보의 구조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 것이다.
반대편 손해보험은 자동차·실손 같은 1년짜리 단기계약이 주력이다. 계약이 짧게 돌고 나가니 거대한 적립분도, 무거운 운용자산도 필요 없다. 자본이 가벼우니 같은 이익이라도 효율은 높게 찍힌다 — 삼성화재 9.5%, DB손해보험 16.4%, 현대해상 19.8%, 메리츠 20.9%. 다만 이 가벼움에는 대가가 있다. 손해보험의 핵심 지표는 받은 보험료 대비 나간 보험금과 사업비를 합친 비율인데, 이게 100%를 넘으면 보험영업 자체는 적자다. DB손보의 이 비율은 약 105%로, 보험만 놓고 보면 받은 돈보다 나간 돈이 많다. 그 구멍은 운용에서 나오는 투자수익이 메운다. 즉 손보의 높은 ROE는 '보험을 잘 팔았다'가 아니라 짧은 계약의 회전과 얇은 자본이 만든 숫자다.
생보가 낮은 효율을 감수하며 얻은 건 거대한 미래이익의 적립분과 규모, 그리고 삼성생명의 경우 그룹 지배구조의 중심이라는 자리다. 손보가 높은 효율을 얻으며 포기한 건 그 거대한 적립분이다. 어느 쪽도 우열이 아니라, 오래전 고른 서로 다른 몸이다. 메리츠는 손보(화재)에 증권을 얹은 통합지주로, 이 가벼운 진영의 맨 끝, ROE 20.9%에 서 있다.
가벼운 손보 진영 안에서도 결과는 다시 갈린다. 두 번째 축은 규제가 재량을 얼마나 가두느냐, 그리고 번 돈을 쌓느냐 돌려주느냐다. 보험사는 지급여력비율(K-ICS)이라는 규제 자본선을 지켜야 하는데, 금리가 내려가면 보험부채의 현재가치가 부풀어 이 비율이 눌리고, 그러면 배당이나 자기주식에 쓸 여력도 함께 좁아진다. 이 규제선 위에서 회사마다 자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삼성화재는 21.3조라는 손보 중 가장 두꺼운 자본을 깔고, 요율이나 손해율이 나빠지는 국면에 그 두께를 완충으로 쓴다. 현대해상은 자본 5.2조로 6사 중 가장 얇게, K-ICS 209%를 두고 굴린다.
여기서 조심할 대목이 있다. 현대해상의 자본이 5.2조로 얇은 배경은 이 공시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메리츠의 얇은 자본 11.3조는 근거가 뚜렷하다 — 번 돈을 자본으로 쌓기보다 되사서 없애는 쪽에 무게를 실어 자본을 얇게 유지하는 정책의 흔적이다. 삼성화재가 두껍게 쌓아 완충을 택한 자리에서, 메리츠는 얇게 유지하며 돌려주는 쪽을 택했다. 같은 손보의 몸을 지녔어도, 번 돈을 어디에 두느냐에서 두 회사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두 축을 겹쳐 보면 메리츠의 자리가 또렷해진다. 가벼운 손보에 증권을 얹은 통합지주로 6사 최고 ROE 20.9%에 서 있고, 그 위에 조정호 회장이 본인 55.78%·특수관계 포함 58.78%를 쥔 지배구조와, 번 돈을 쌓기보다 되돌리는 공격적 정책이 한 겹 더 얹혀 있다. 이 회사는 산업의 공통 국면만 지나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자기만의 자본 정책을 한 겹 더 두르고 있다.
먼저 회사가 어쩌지 못한 것들부터 갈라내자. 영업이익이 9.9% 줄고도 순익이 0.7% 늘어난 어긋남은 회계와 금리가 쓴 것이지 회사가 고른 결과가 아니다. 핵심 자회사 메리츠화재의 지급여력비율이 241.3%에서 반기 230.5%(잠정)로 눌린 것도 금리가 밀어낸 몫이다. 캐피탈이 사업보고서에선 순익 4,021억(+37%)을 냈다가 2026년 반기 부실여신 회수 지연과 대규모 충당금으로 420억(-77%)까지 주저앉은 것도, 크기 자체는 회사가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 손실이 이자에서 왔는지 다른 데서 왔는지, 그 아래 단계는 이 공시만으론 더 내려가 확정하기 어렵다.
재량이 뚜렷하게 닿은 자리는 자본거래에 있다. 전기 자본변동표에는 자기주식 매입 8,624억, 소각 6,401억, 배당 4,483억이 나란히 찍혔고, 2026년 3월 26일 회사는 7,000억 규모의 자기주식 신탁을 새로 맺으며 이걸로 산 주식은 추후 소각한다고 못 박았다. 같은 날 앞서 굴리던 2,000억 신탁을 접고 돌아온 165만4천 주를 전량 태우기로 했다. 소각한 6,401억은 지주회사 별도 이익잉여금을 3조3,546억에서 2조7,857억으로 5,688억 덜어냈다 — 순이익이 났는데 별도 잉여금이 줄어든 모순의 범인이 바로 이 자본거래다. 순이익 2조3,501억이 제자리인 해에, 그에 맞먹는 돈을 되사서 없앤다. 번 것과 되돌린 것의 크기가 비슷하다는 이 그림이 이 회사를 규정한다.
그런데 소각에는 배당과 다른 그림자가 하나 붙어 있다. 발행주식이 줄면 남은 주주의 지분율은 손 하나 대지 않아도 올라간다. 조정호의 지분율은 56.14%에서 58.21%로, 다시 6월 보고에서 58.78%로 올라섰다(여기엔 특수관계자 김종민의 장내 매수도 겹친다). 회사는 이 신탁을 '주주환원정책 이행의 일환'이라 설명한다. 그 설명과 나란히, 같은 소각이 최대주주의 지배력을 배당보다 조용히 키운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어느 쪽이 이 결정을 움직인 무게였는지, 두 사실을 이어 붙일지는 이 자료만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두 사실을 나란히 세워둘 뿐이다.
앞으로 7,000억 신탁이 언제 얼마나 소각으로 이어질지는 신탁 종료 시점의 별도 이사회에서 정한다고 회사는 예고했을 뿐, 아직 실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금리가 지급여력을 어느 쪽으로 밀지, 되사기의 속도가 유지될지, 캐피탈의 부진이 지주 전체 이익에 얼마나 남을지 — 메리츠의 다음 장은 손익계산서보다 자본계정과 규제선 위에서 먼저 쓰일 자리에 놓여 있다.